[전명희의 맛있는 개똥철학] 요때 죽으면 딱 좋아

전명희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팔팔하게 구십구 세까지 살자는 의미의 ‘8899’라는 유행어만 봐도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알 수 있다. 물론 살고자 하는 욕망은 생명의 본능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뒷전으로 밀리고,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가 삶의 성적표처럼 되어 버렸다, 백 살을 넘기면 성공한 인생이고, 일찍 세상을 떠나면 무언가 손해라도 본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오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유 키즈 온 더 블럭’이라는 티비 프로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중에 평생 술 먹고 놀아도 지금 거뜬하다고 할아버지가 말하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요때 죽으면 딱 좋아”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요때 죽으면 딱 좋아” 이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화두가 되었다. 할머니는 ‘가야 할 때를’ 잘 아는 지혜로운 분인 것 같았다.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은 할머니의 ‘요때 죽으면 딱 좋아’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더 깊게 들어가 있는 지혜의 말이다. 

 

우리말 중에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있다. 골골거리며 병과 싸우면서도 팔십까지 장수한다는 말이다. 유병장수라도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했다지만 왠지 짠하고 안쓰럽다. 우리는 오래 사는 것이 복이고, 한 살이라도 더 사는 것이 승리라고 여긴다. 백 살을 넘기면 축하하고, 백이십 세까지 살 수 있다는 말에는 귀가 번쩍 뜨인다. 죽음은 어떻게든 물리쳐야 할 적이고, 장수는 무조건 쟁취해야 할 업적이 된 지 오래다. 오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하루를 백년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백년을 탐욕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죽음은 언제나 일찍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올 때가 되어서 오는 손님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태어났으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려 한다. 젊음은 놓지 않으려 하고, 늙음은 감추려 하며, 죽음은 어떻게든 멀리 밀어내려 한다. 건강을 지키는 일이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래 살기 위해 오늘의 기쁨을 모두 희생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 인생인가. 여든에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고, 아흔에도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끝없이 움켜쥐려는 욕심과 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의욕은 구별해야 한다. 인간도 자연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고,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

 

자연을 보라. 봄꽃은 피어나는 데 온 힘을 다하지만, 꽃잎이 질 때가 되면 나무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는다. 열매를 맺을 만큼 맺고, 때가 되면 자신을 비운다. 낙엽은 죽어서도 다음 생명의 거름이 된다. 자연에는 끝이 있지만, 그 끝은 소멸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자연에는 피어나는 때가 있고, 무르익는 때가 있고, 물러나는 때가 있다. 어느 한 계절도 영원히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태어났으면서도 자연의 법칙만큼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요때 죽으면 딱 좋아’라고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감사는 가야 할 때를 아는 것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

 

작성 2026.11.06 10:32 수정 2026.11.0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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